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30퍼센트의 사람들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길 가는 사람 열 명을 잡으면 그 중에서 세 명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이 특별한 사람들은 대개 학생일 무렵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되는데,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센터라고 불리는 기관에 들어가 등록을 하고 많은 노력을 해야 능력의 범위, 절대치, 효과 같은 것의 틀을 만들어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것이다. 센터에서 사람의 한계를 알아두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욕심을 내서, 자신이 쓸 수 있는 것 이상을 사용하려고 하면 자신은 물론 주위까지 삼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인간재앙이다. 하지만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언제나 스스로 한계 전까지 조절해서 쓰는 것은 불가능하며, 할 수 있다는 자만심 한 방울 때문에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던 것이 무너지기도 한다.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잘 사용하기 위해 사람들은 고민을 시작했고, 그 고민의 끝은 능력자들을 케어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쿠로오 테츠로는 중학교 3학년 때 한 검사에서 양성반응을 얻은 이후로 항상 센티넬이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던 생활을 끝내고 센터에 들어가 전문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검사를 연말에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중학교 졸업 시기와 맞물려서 모두 헤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었으니까. 센터에 들어가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없어도 소꿉친구 켄마가 잘 지낼지가 걱정되었다. 아니, 오히려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소꿉친구가 센티넬이니까. 이성을 잃으면 재앙이 되는 센티넬이 소꿉친구니 건드릴 사람이 없어질 것이었다.
쿠로오는 남의 일인 것 마냥 무기력하게 기다리다가 눈을 둘 곳이 없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는데, 유리문 앞에 선 두 사람을 발견했다. 센터에 왔으니 분명 양성반응을 받아서 온 거겠지. 쿠로오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고 시선을 다른 곳까지 옮겨볼 생각이었다. 생각만 그랬다. 예쁘게 생긴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경비원이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봐서는 덤덤하게 눈물을 삼키려는 사람이 양성반응이고, 우는 사람이 음성반응인 것 같았다. 정말 친한 사이인데 헤어지게 되었나보다. 하지만 그게 저렇게 안타까운 일인가? 십여 년 옆집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켄마는 눈에 물기 한 방울 없었는데.
멍하니 두 사람을 눈에 담고 있었는데, 옆에 서 있는 사람의 수가 많아졌다. 언제부터 늘어났는지 궁금해 하고, 놀랄 법도 했지만 쿠로오는 그저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한 예쁜 사람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쿠로오가 알아차렸다고 한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렇다면 보고 싶은 것을 더 보고 있는 것이 옳았다. 물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센티넬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은 뒤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정신이 약해서 타인의 도움이 없으면 그대로 자멸하고 주위에 피해를 주는 센티넬. 그것이 쿠로오가 받게 될 시선이었다. 거기에 경멸이 조금 더 더해진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서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 사람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번개처럼 생각이 들어왔다. 저 검은 머리의 남자와 친해지면 한번쯤은 만날 기회가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 경비원들이 둘을 강제로 떼어놓자 쿠로오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웃는 표정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좋은 첫인상이 좋은 관계로 나아가는 튼튼한 발판이 되는 법이니까.
쿠로오의 생각과 다르게 유리문을 넘어 들어온 사람은 예쁜 사람이었다. 뒤에서 검은 머리의 남자가 끌려가는 게 눈에 살짝 들어왔지만, 점점 다가오는 예쁜 사람의 모습에 쿠로오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 사람은 쿠로오의 옆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 사람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다가 쿠로오는 손수건을 건넸다. 필요하면 써.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말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입을 열어 소리라는 것을 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 사람의 “고마워.”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머릿속에 종이 울리지도 않았고, 팡파르가 터지는 소리도 없었고, 세상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쿠로오는 이 사람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자주 만나게 되면 좋을 거라고, 배치가 근처로 되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 사람은 다 울었는지 코를 훌쩍이고서는 쿠로오를 바라봤다.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 손수건은 나중에 빨아서 돌려줄게.”
“나는 쿠로오 테츠로. 손수건은 천천히 줘도 돼. 센티넬 반응이 나와서 오래 있을 것 같거든.”
“쿠로오? 쿠로쨩이라고 부를게. 쿠로쨩은 어떤 능력이야?”
오이카와의 말에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이지만 애칭이 생기는 관계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워진 것 같아서 좋았다. 하지만 어떤 능력이냐고 물었을 때, 쿠로오는 고민했다. 검사만 양성이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미안, 아직 잘 몰라.”
“쿠로쨩이 미안할 건 없지! 원래 대부분 모른다더라. 나는 가이드 양성이 나왔어.”
“가이드?”
“왜? 이상해?”
“센티넬처럼 예쁘게 생겨서.”
“그래 보여? 오이카와 씨가 많이 잘생겼지. 반해도 괜찮아! 쿠로쨩이 원한다면 도쿄 지역 팬 1호로 삼아줄게!”
오이카와는 조금 전까지 울었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쿠로오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팬 1호 할게.”
“어? 보통이라면 태클을 건다고?”
“하고 싶으니까.”
“좋아, 센티넬 팬은 처음이야!”
쿠로오는 잡아오는 오이카와의 손을 맞잡고 오이카와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이드 판정이 나와서 왔지만 솔직히 가이드는 항시 대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이야기. 정말 필요할 때만 센터로 오거나 같이 나가서 일을 하고 오고, 평소에는 일상을 지내도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 소꿉친구라고 믿었던 이와이즈미가 아까부터 센터의 유리문 밖에서 보이지 않아 배신당했다는 이야기, 항상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는데 갑자기 타인을 위해 살라는 게 말이 되느냐는 이야기, 이상한 센티넬을 만나면 나만 죽을 것 같다는 이야기.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추임새를 넣으면서 열심히 오이카와의 이야기를 들었다. 잠깐이라도 오이카와를 만나기 위해서 센티넬 양성반응이 일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오이카와의 말을 듣는 지금이 행복했다.
“아, 검사 했는데 가이딩을 할 수 있는 적합률이 안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새 센티넬이 검사 받을 때마다 와야 할 걸?”
“하지만 그러면 그 동안은 센터에서 살지 않아도 되잖아. 운이 좋다면 평생 밖에서 살 수도 있고.”
“밖이 그렇게 좋아?”
“응! 난 엄청 유능한 세터거든! 상도 받았어. 아, 세터 알아? 배구의 한 포지션인데 제일 멋있어!”
네가 하니까 더 멋있을 거야. 쿠로오는 익숙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숨겼다. 배구 이야기를 하는데도 이렇게 반짝반짝하는 너라면, 분명 그곳에서는 더 빛날 거야. 쿠로오는 그 생각 아래에 오이카와가 자신의 가이드였으면 하는 바람을 묻었다. 평생 맞는 센티넬이 나타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즐거울 수 있도록.
“쿠로오 테츠로, 들어오세요.”
“아, 나 부른다.”
“그럼 가 봐! 재밌었어!”
“나도!”
둘 모두 다음에 보자는 소리도 없이 인사를 마쳤다. 한 명은 대기실 밖 의자에, 쿠로오는 검사실 안으로. 검사실에서 이것저것 테스트를 하는데 계속해서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가이드 검사는 다시 한다던데 양성반응이 나왔을까? 음성을 원하는 것 같던데. 혹시라도 양성이라면 맞는 센티넬은 찾았을까? 아니면 벌써 돌아갔을까.
“센티넬 쿠로오?”
“네? 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물리력을 행사하는 센티넬은 아닌 것 같고, 다른 검사를 받으러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왕이면 정신계나 특수계로.”
“예? 능력이 거의 없는 센티넬일 경우는 없나요?”
센터에서 관리할 필요가 없는 센티넬이 된다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오이카와를 만나러 갈 수 있을 텐데.
“그건 검사를 더 해봐야 나오겠지요. 그런데 ‘오이카와’가 누구예요? 친구?”
“네? 아니요.”
“검사를 하는데 오이카와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아서요. 잘못 들었나?”
물리력 센티넬 검사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신계 센티넬 검사소에서 쿠로오는 텔레파시인 것 같다는 검사원의 소견을 들었다. 아직은 쿠로오 쪽에서 강하게 생각하는 것을 주위에 전달하는 것 밖에 못하는 것 같지만, 상대와 정신으로 이어져 대화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며 검사원은 기뻐했다. 국내에서 최초로 텔레파시 능력자가 나올지도 모르며, 능력을 더 꽃피우면 물건의 기억을 읽는 사이코메트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검사원이 뭐라고 말하든 쿠로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냥 센티넬이라고 확인을 받은 기분이었다.
검사원은 쿠로오에게 내일부터 다른 검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키트를 이용해서 적합률을 쟀는데, 지금 바로 페어로 맺어도 괜찮을 80%가 나온 가이드가 있다며 한 번 볼 것이냐고 물었다.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긴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쿠로오는 오이카와를 다시 만났다.
“쿠로쨩?”
“미안해.”
오이카와는 쿠로오의 말을 듣자마자 배를 잡고 웃었다. 다시 만나자마자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웃었다. 쿠로오는 오이카와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자신의 가이드라는 사실에 정말 감사하고 기뻐했지만, 오이카와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 같아서 미안했다. 두 감정이 섞여서 분명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텐데도, 오이카와는 이상한 센티넬이 아니고 너라서 다행이라고 웃었다.
검사원들은 아는 사이었냐면서 잘 지내보라고 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검사원들의 말 덕분에 쿠로오는 오이카와와 식당까지 같이 가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에 편의점에 들러 우유빵을 샀다. 운동부 학생은 더 먹어야 한다며 세 개를 사서 하나를 쿠로오에게 건넸지만 쿠로오가 거절했다. 난 운동부가 아니야. 오이카와는 씩 웃으면서 “그러면 다음에는 쿠로쨩이 좋아하는 것도 먹자!”라고 말했다. 다음이 있는 관계라는 것이 행복해져서, 쿠로오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각자 다른 방을 배정받아 헤어지고 그렇게 하루가 끝났다.
다음날엔 적합률 검사를 했다. 수많은 기계가 있는 곳에 누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몇 시간이 걸리는 검사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오이카와의 말을 섞으며 쿠로오는 오이카와가 미야기에서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제일 싫어하는 윙 스파이커가 있는데, 고등학교에서 더 멋있는 팀을 만들어서 그 사람을 눌러주고 싶다고 했다.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연구원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덕분에 폭포가 쏟아지듯 콸콸 흐르던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연구원을 향해 눈을 흘기면서도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불안이 둥둥 떠올랐다. 다 된 걸까? 뭔가 이상한 일이 생겼나? 오이카와가 가이드가 아니게 해주세요. 가이드라면 부디 적합률 부적합이 뜨지 않게 해주세요. 쿠로오는 그렇게 제 소원을 빌었다.
“정말 놀랍게도- 적합률 95%입니다. 어릴 때부터 함께 한 사이도 아닌데 특이하군요.”
연구원의 말에 대충 자리 잡혔던 숙소의 위치가 바뀌었다. 방은 조금 더 컸고, 문 두 개만 넘으면 서로를 만날 수 있었다. 상대가 열어준다는 전제하에서였지만 그러면 어떤가. 물리적으로 가까워졌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걸.
쿠로오는 날마다 능력을 개발하고 한계를 재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상상 속에서만 등장하는 능력이었기에 어떤 방법으로 능력을 일깨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가이드라인이 없었다. 때문에 쿠로오는 몸으로 직접 깨우쳐야 했다. 조금만 더 해보려는 욕심이 더해지면 어김없이 두통이 괴롭혔고,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숨도 못 쉴 정도의 고통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옆에 있던 오이카와가 손을 잡아주고, 포옹했다. 그러면 쿠로오의 아픔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졌다. 오이카와가 웃으며 손을 잡아줄 때마다 쿠로오는 깨달았다. 오이카와가 가이드고 자신이 센티넬이라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오이카와라서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쿠로오의 훈련이 끝나면 항상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물론 센터 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연구원들의 시선도 거둬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유 시간이었다. 오이카와와 쿠로오가 대화를 할 수 있었으니까. 오이카와는 항상 방학 기간인데도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투정을 부렸다. 쿠로오가 조금 늦잠을 자야 효율이 오를 것 같다며 동의하자 오이카와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쿠로쨩이라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어! 오이카와의 웃음이 따스해서, 쿠로오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센티넬과 가이드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의 연구는 하고 싶지 않으세요?”
쿠로오의 결심은 센티넬과 가이드가 개인 상담을 받을 때 행동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라면 꼭 해보고 싶지만 어떤 센티넬도 가이드와 일부러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아 할 수 없었던 연구. 하지만 그것을 센티넬 쪽에서 제안한다면 고민하는 척 하다가 시도를 해보자고 말할 것이라고 쿠로오는 추측했고, 도박을 걸었다.
“하지만 쿠로오 군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았고-.”
“페어가 해제된 센티넬과 가이드를 연구하는 것보다, 적합률 95%의 페어를 연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유사시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쿠로오의 제안이 솔깃했던지, 연구원은 어영부영 상담을 끝내려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가이드 오이카와가 불편해서, 혹은 새 가이드가 필요해서 그런 말을 했는지 지나가듯 물었지만 쿠로오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저 이곳에 있다 보니 탐구심이 강해져서, 궁금해져서 말했다고 했다.
연구원들은 쿠로오가 마음을 바꿀까봐 급했는지 다음날 훈련 후 바로 상담을 잡았다. 쿠로오는 상담이 잡힌 걸 보고 오이카와에게 말했다. 잘하면, 너는 밖에 있는 학교에 다닐 수 있을 거야. 오이카와가 눈을 빛내며 쿠로오에게 연구원한테 어떤 말을 했는지 물었다. 쿠로오는 그저 센티넬과 가이드가 자의적으로 떨어져있는 연구를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운을 띄웠다고 했다. 오이카와는 성공만 한다면 이제 배구를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고맙다고 쿠로오를 끌어안았다. 쿠로오는 오이카와의 미소가 예뻐서, 맞닿아 있는 지금이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성공적이었다. 제한이 조금 많이 붙기는 했지만. 연구원들이 처음에 기간을 얼마나 잡고 싶은지 물었을 때, 쿠로오는 3년이라고 답했다. 오이카와가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간이었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3년은 너무 긴 것 같다며 말끝을 흐렸고, 연구원들의 반응에 급해진 오이카와가 새로 딜을 걸었다. 5개월마다 한 달 정도를 쿠로오와 지내어 보겠다고. 연구원들은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고 수긍했다. 그리곤 쿠로오가 폭주를 할 것 같으면 언제든 와야 한다고 말했다. 오이카와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쿠로오는 오이카와가 좋다고 해서 바로 수긍했다. 하지만 후에 배구부 합숙은 대개 방학 때 있다는 것을 알고 후회했다. 알았다면 함께 있는 기간을 더 줄였을 텐데-하고.
센터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날, 오이카와는 하루 종일 울었다. 저녁 먹기 전에는 쿠로오에게 고맙다며 울었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전화를 붙잡고 울었다. 내용은 제한은 좀 있지만 센터에서 나가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쿠로오는 오이카와가 탈수로 말라버릴 것 같아서 물을 건넸다. 그러자 웃으며 울고 있던 오이카와가 눈꼬리를 휘면서 받아들었다. 입모양으로 ‘고마워’라고 말한 것처럼 보여서 쿠로오도 마주 웃었다.
오이카와가 미야기로 가기 전까지, 쿠로오는 오이카와와 붙어있었다. 가이딩을 한껏 해놓는다고 나중에 쓸 수 있게 저장이 되는 것도 아닌데, 틈이 날 때마다 손을 잡고 가이딩을 했다. 그리고는 센터의 힘으로 원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며 자랑했다. 배구를 잘 하는 학교니까 전국대회에도 갈 수 있을 거라고 웃었다. 쿠로오는 마주 웃으며 전국대회에 나간다면 한번 구경을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 약속이 평생 지켜지지 않을 거라는 건 쿠로오도, 오이카와도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쿠로쨩! 방학 때 올게!”
오이카와가 인사를 하고 떠나도 쿠로오의 생활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주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생각을 전하는 것을 연습했고, 그것이 성공했을 경우 접촉의 유무와 떨어져 있는 거리, 혹은 성별에 대한 것도 기록되어 데이터화 되었다. 다음날 바로 더 발전된 것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데이터가 차곡차곡 쌓일수록 쿠로오가 능력을 쓰는 것도 점점 매끄러워졌다.
센터의 최종 바람은 쿠로오가 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었지만 그 바람까지 닿는 것은 매우 어려워보였다. 정해진 사람이라는 대상이 너무 모호했고,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정해진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처럼 수신과 발신이 전해져 있고, 무전처럼 무전기를 소지한다면 또 모를까.
능력을 발전시키는 좋은 방법도 없었고, 옆에 가이드가 없는 실험도 하고 있기에 힘든 날도 많았지만 대개 잠시 휴식을 취하면 다시 훈련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날도 있었다. 한계까지 몰린 뇌는 비명을 질렀고,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폭력처럼 들어온 날이었다.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고, 가이드가 없어도 훈련을 잘 받고 다음날 훈련에도 지장이 없을 거라고 다짐한 쿠로오였기에 쿠로오는 밤새 이를 악물며 삼켰다. 수적해진 얼굴에 다른 센티넬과 가이드들이 불쌍해하거나 손가락질을 하며 야유를 보내는 것도 느물거리면서 넘어갔다. 혼자서 버텼다. 어쩔 수 없었다. 가이드를 처음 봤을 때부터 반했으니까. 우는 얼굴도 예뻐 보일 정도로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쿠로오는 오이카와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었다. 너무 힘든 날이면 가만히 침대에 누워 날짜를 헤아렸다. 고등학교의 방학은 얼마나 남았더라. 그리고 기다렸다. 방학 때마다 즐거운 일과 웃음을 가득 가지고 오는 오이카와를 기다렸다.
오이카와가 학기를 마치고 센터에 오면 쿠로오의 겨울은 봄이 되었다. 두텁게 쌓였던 벽도 녹아 없어졌고, 머릿속을 에는 바람도 더 이상 불어오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의 웃는 얼굴만 봐도 행복해졌으니까. 오이카와는 쉬는 시간과 식사 시간, 잠들기 전까지 계속해서 자신이 겪은 일들을 꺼냈다. 쿠로오는 오이카와와 함께 겪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오이카와의 시간에 조금이나마 발을 담그는 것 같아서 즐거웠다. 솔직히 눈으로 직접 보고 겪는다고 해도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쿠로오의 시점이 아닌, 오이카와의 시점에서 듣는 이야기라서 더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첫 방학이 끝날 무렵에는 오이카와와 메일주소도 교환을 했다. 오이카와는 배구 연습 때는 연락이 늦어지겠지만, 수업 시간에는 재깍재깍 답할 거라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항상 연락을 하면 몇 분 이내로 답장이 오곤 했다. 서비스 에이스라 집중을 해야 한다고 했으면서도 답장이 오는 것은 그만큼 쿠로오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일까.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이드는 센티넬을 생각해주는 걸까. 오이카와는 센터 밖에 나가 있는데도 센터 안에 있는 것처럼 신경을 쏟는 것 같아 쿠로오는 연락을 줄였다. 그랬더니 오이카와의 메일에 사진까지 첨부되면서 더욱 자주 왔다. 답장은 여전히 등교하는 이른 시간, 점심시간, 늦은 밤에만 보냈지만 오이카와는 쿠로오의 답장에 연연하지 않고 보냈다. 덕분에 쿠로오는 오이카와의 소꿉친구도 다시 보게 되었고, 오이카와의 팀도 알게 되었다. 오이카와가 등교하는 길도 알게 되었고, 회식을 가면 어느 곳으로 자주 가는지도 알게 되었다.
오이카와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쿠로오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좋아한다는 상대를 알아간다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새어나올 정도로 행복했지만, 오이카와에게 센터 밖의 일은 모두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버려서. 오이카와가 최대한 밖에서 지낼 수 있도록 쿠로오는 이 시기부터 귀에 제어기를 달았다. 처음에는 멀미가 나곤 했지만, 어떻게든 견뎌냈다. 제어기만 있어도 폭주하지 않고 최대한의 능력을 쓰는 첫 번째 센티넬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제어기가 연구원들의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쿠로오의 능력을 출력하면서 쿠로오는 한계까지 몰리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가 쿠로오는 자신의 폭주가 주위의 소리를 가감 없이 듣는다는 것을 알았다. 괜찮은지에 대한 수많은 걱정이 들려와서 쿠로오는 막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 귀를 막았다. 너무 힘들어서 정신적인 안정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이 폭주는 어이없게도, 오이카와의 전화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로 끝났다. 가이드의 목소리만 들어도 안정이 되는 센티넬이라니. 쿠로오는 자신이 오이카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고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뭔가를 세고 있던 오이카와가 당장 센터로 가는 기차를 타겠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 무호흡 상태였다. 마음이 넘쳐흐르는 이 감각이 기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들려오는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조금씩 호흡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었다.
쿠로오의 폭주가 가라앉은 이후로, 연구원들은 오이카와가 먼 곳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것에 아무런 이의를 제의하지 않았다. 정 급하면 전화통화로 폭주를 멈추면 되니까. 쿠로오는 오이카와가 꼭 센터로 와야 한다는 강제성이 사라져서 정말 기뻐했다. 이대로라면 오이카와는 가끔씩 센터에서 연락을 받는 평범한 외부인으로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센터에서 연락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평범하지는 않았으니, ‘가이드 치곤’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강제성이 사라진 것은 역시나 가이드에게는 특별해서, 쿠로오는 오이카와에게 어느 대학에 갈 것인지 쉽게 물어보곤 했다. 어느 대학교는 유니폼이 좋았고, 어느 대학교는 이름이 있어서 배구부라고 하면 환호를 받을 거라는 쿠로오의 추천에 오이카와는 생각중이라며 눈웃음을 짓곤 했다. 그래서 오이카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센터로 왔을 때, 쿠로오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안 될 것이라고 포기하고 있던, 제일 바라고 바라왔던 일이 일어난 게 기뻐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그 후부터 쿠로오의 옆에는 항상 오이카와가 있었다. 오이카와의 가이드 이수교육이 끝나고 반 년 간 같이 호흡을 맞춘 후부터 같이 정식 임무에 투입되었다. 가끔 오이카와가 다치기는 했지만 무사히 귀환하는 날이 많아서 다음에는 조심하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어서 행복했다. 쿠로오는 자신이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센티넬이라서 좋았다. 오이카와가 가져야만 했던 행복한 시간을 빼앗지 않고 오이카와가 다가올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이 능력에 오히려 감사했었다. 그랬었다. 그랬었는데-.
“오이카와!”
-오이카와!
쿠로오는 열리지 않는 문에 몸을 부딪치며 오이카와를 불렀다. 오이카와가 소리로도, 정신으로도 대답하지 않아서 쿠로오는 감각을 더 펼쳐 주위를 읽으려고 노력했다.
“제길!!”
쿠로오가 모든 세포를 불태울 것처럼 노력해서 들은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빌런이라고 생각되는 여러 명과 죽고 싶지 않다고 정신으로 소리치는 요원과 긴장해서 하얗게 보이는 사람들과 이 정도면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빌런 중에 센티넬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데 이길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오이카와의 확신에 쿠로오는 열리지 않는 문만 주먹으로 내리쳤다. 자신보다 힘이 강한 오이카와가 먼저 나가서 처리를 해두었다면 열리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쿠로오는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방을 나가서, 오이카와를 도와야 했다. 쿠로오의 전투능력이 떨어진다지만 혼자보다는 둘이 나은 법이었다. 거기에 위급한 상황이라면 오이카와를 대신해서 많이 다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쿠로오는 어차피 한 자리에서 가만히 있다가 때에 맞춰서 신호를 내리면 되는 센티넬이니까.
누군가의 죽고 싶지 않다는 강한 생각이 쿠로오의 뇌에 직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차라리 죽여 달라는 말이 이어지는 것으로 봐서 빌런 쪽이 우세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오이카와가 열세였다.
쿠로오는 다시 문을 향해 몸을 부딪쳤다. 가서 도와야 하는데, 적어도 센티넬이라고 말해서 관심을 조금이라도 돌려야 하는데. 잠깐의 틈만 있어도 전투에 능한 오이카와는 이곳을 포기하고 나갈 수 있을 텐데. 쿠로오는 눈앞에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하얀 불꽃으로 변해 튈 때마다 반동까지 이용해서 문을 향해 몸을 던졌고, 계속해서 바닥에 쓰러졌다. 하얀 불꽃은 점점 꺼져갔고, 쿠로오의 얼굴도 좌절로 일그러졌다. 오이카와보다 강하기만 했어도, 아니 충분한 힘과 체력이 있어 오이카와의 발목을 붙잡지만 않았어도 이곳을 버리고 같이 탈출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처음부터 폭탄테러를 예고한 빌런 하나만 있다며 지원을 조금만 받고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함정인 줄 알았다면 일반인으로 꾸려진 팀이 아닌 다른 센티넬의 합류를 기다려서 팀을 만들어 왔을 텐데.
-쿠로, 쨩.
-오이카와? 몸은 어때? 다친 곳은 없어? 도망칠 수 있어? 왜 이제야 연락을 하는 거야!
-빌런들은 다 갔고, 조금 다쳤어. 당분간 쿠로쨩이 밥 먹여줘야 할지도.
쿠로오는 오이카와의 연락에 안심을 담아 숨을 뱉었다. 역시 오이카와였다. 빌런의 수가 많은 것 같아 걱정이 조금 있긴 했지만 오이카와가 잘 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조금 다쳤다면, 센터의 지원을 기다렸다가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정신으로 하는 연락이 아니라, 둘이 붙어서 투덕거리며 장난을 치면서 기다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빨리 돌아와. 도대체 문 앞에 뭘 쌓아두고 온 거야? 나갈 수가 없잖아.
-그런데 쿠로쨩, 오이카와 씨가 조금 졸려서-. 조금만 자고 갈게.
-오이카와? 오이카와! 잠들지 마! 안 와도 되니까 자지 마! 눈 떠!
-오이카와 씨, 엄청-, 졸려서, 미안해.
-자지 마! 잠들면 안 돼! 오이카와! 오이카와!! 오이카와!!!
오이카와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쿠로오는 몇 번이고 오이카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답해오는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나 사람이 많았었는데, 팀으로 왔었는데, 쿠로오는 폭주 직전까지 능력을 개방했지만 누구의 생각도 읽을 수 없었다. 검붉은 적막이 스멀스멀 다가와 쿠로오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오이카와, 장난으로 연락 안 받는 거지? 충분히 놀랐으니까 그만해. 지금 웃으면서 문 열어도 화낼 거야.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없었다.
-오이카와, 일어나! 자지 마! 일어나!
몇 번이고 오이카와를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집중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픈 건지, 아니면 정신을 잃어서 아예 접속할 수 없는 건지. 쿠로오는 가만히 있어도 욱신거리는 몸을 한 번 더 사용했다. 여전히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고, 쿠로오도 여전히 뒤로 넘어져있었다. 문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쿠로오는 이내 웃기 시작했다. 제 처지가 정말 웃겼다.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받았으면 뭐하나. 국내에 한 명 뿐인 귀한 센티넬이면 뭐하나. 제 짝이 쓰러진 시기에 손도 잡아줄 수 없는데. 제 연인이 쌓아두고 간 것을 치울 힘조차 없는데. 머릿속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정말 쓸모가 없었다.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뻔했다.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적어도 가이드를 앞으로 내보내지 않고 자신이 앞에 서서 등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었다면.
쿠로오는 비틀거리며 탁자로 움직였다. 지금 구하러 오는 중이라는 무전이 올 정도로 가깝다면 오이카와가 쓰러져 있어도 살릴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여전히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작전이 실패했고, 몇 명의 생체신호가 정지했다는 것을 확인했을 텐데도 센터는 지원대나 구조대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일을 처리하라고 보내둔 주제에 마지막까지 도와주지도 않았다. 다 할 것처럼 말하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다. 그리고는 연락이 늦게 되었거나 힘이 없어서 구하지 못했다고 변명하겠지. 마치 쿠로오처럼. 가이드를 전투에 내보내고 혼자 아무 상처도 없이 살아있는 쿠로오처럼.
쿠로오는 한쪽 귀에 착용하고 있던 제어기를 풀었다. 누군가가 센터에 연락을 해준다면 센터도 어떻게든 인원을 데려와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까 쿠로오가 있는 이 건물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센터에 연락해줄 시민만 있다면-.
“거, 짓말.”
쿠로오는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려 나머지 제어기를 잡아 뜯었다. 제어기를 착용했던 귀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지만 그 아픔도 충격 때문에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제어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데도, 가이드가 없는데도 너무나도 고요했다. 깊은 산 속에 홀로 있어도 이렇게 조용하지는 않을 텐데. 센티넬이 된 이후로 꿈에서도 본 적 없는 적막이 쿠로오 옆에 있었다. 너무 힘든 날에는 소리가 사라져버리기를 바랐지만, 그 희망사항이 이렇게 결과로 나타날지 몰랐다. 지금 이렇게 조용해질 걸 알았다면, 어딘가에 신이 쿠로오의 바람을 들어줄 줄 알았다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쿠로오는 그때 한숨과 같이 내뱉은 말을 주워 삼키고 싶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두 손으로 목을 졸라서 한 번이라도 조용했으면-이라는 말을 나오지도 못하게 막아버리고 싶었다.
쾅-. 쾅-. 쾅-. 쿠로오는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시끄러워서 정신을 놓고 싶었을 때보다 더 숨이 막혔다.
-아무도 없어요? 제발, 누가 센터에 연락 좀 해주세요! 누군가, 이 소리가 들린다면, 제발!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임무를 받을 걸. 조금만 더 위험하다는 걸 일찍 인지할 걸. 조금만 더 이곳을 버릴 결단을 내리고 탈출할 걸. 조금만 더 신체능력이 강했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만 더 좋은 능력을 가진 센티넬이라면 좋았을 텐데. 조금만 더 생존훈련을 배워둘 걸. 조금만 더 무기를 다루는 법을 익힐 걸. 오이카와가 자신한테 맡기라고 할 때 알겠다며 웃지 말고 옆에서 조금만 더 무엇이라도 더 할 걸. 조금만 더 노력할 걸.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오이카와를 사랑할 걸. 조금만 더 좋아한다고 말할 걸. 조금만 더 자신을 아껴달라고 말할 걸. 무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포기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덜 사랑해달라고 말할 걸.
“뭐가 가이드를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는 센티넬이야. 뭐가. 어디가.”
이렇게 무기력한데. 오이카와의 희생 없이는 살아남을 수도 없는데. 쿠로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흐를 때마다 기억속의 오이카와 얼굴이 희미해져서 눈을 감았다. 괜히 눈물을 훔치다가 오이카와까지 닦아내고 싶지 않았다.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몽롱했다. 그런데도 눈을 뜨니 쓰러져 있는 오이카와가 보여서, 쿠로오는 손을 뻗었다. 손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마지막이라도 같이할 수 있다면. 머리가 녹아내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쿠로오는 의식이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쿠로오는 익숙한 소음에 눈을 떴다. 머리가 아프고 별별 이야기가 다 들려왔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정신을 잃기 전에 이렇게 들렸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쿠로오는 한 층의 소리를 다 들으며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약간의 붕대만 제외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확인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중한 사람과의 연결이 끊어져서 난리를 쳤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제 몸만 멀쩡하다니. 어딘가 부러진 곳도 없다니. 좋아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입에 달고 살았지만 결국 자신은 오이카와보다 제 몸이 더 소중했던 것은 아닐까.
쿠로오는 익숙하게 스탠드 옆에 있는 제어기를 착용했다. 소음이 줄어들었지만, 없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너무 고요했으면 쿠로오는 억제기를 지난번처럼 빼버렸을 것이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 있다면, 수많은 생각에 밀려서 익사해버릴 테니까. 그 중에는 분명, ‘너는 말로만 오이카와를 아꼈어’라는 제 목소리도 끼어있을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조용해지면 그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쿠로오는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오이카와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고, 위치를 듣자마자 발걸음을 옮겼다.
오이카와의 모습은 들었던 것보다 처참했다. 왼팔을 제외하고는 모두 깁스를 하고 있었으며 깁스가 없는 부분은 붕대로 빈틈없이 메워져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시선을 산소호흡기 위로 돌리면 굳게 닫혀있는 눈꺼풀이 보였다. 이렇게 다쳐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조금 다쳤다고-. 쿠로오는 이를 갈았다. 잠이 온다고 하기 전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조금 다쳤다는 말에 안심하지 않고 오이카와를 만나러 문을 열고 나갔어야 했는데. 꽉 다문 잇새 사이로 울음이 조금씩 흘러 나왔다. 오이카와가 일어나려면 경과를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지만 소리를 내서 울 수 없었다. 쿠로오에게는 소리를 내어 울 자격도 없었다. 오이카와의 앞에서 울게 되어서 미안할 뿐이었다.
그 후, 쿠로오는 매일 같이 병원을 찾았다. 첫날처럼 오이카와의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계속 병실 밖에 앉아있었다. 검진을 하러 오는 의사와 치료를 위해 들어오는 센티넬들이 하는 말을 벽 너머에서 들으며 계속 앉아있었다. 병실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항상 좀 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줬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겠습니다는 호전되고 있습니다로 바뀌었고,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는 말은 조금 더 몸이 나으면 정신도 돌아올 거라는 말로 바뀌었다. 쿠로오는 그 사람들에게 정신이 반 쯤 빠진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하다고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 번이라도 오이카와가 있는 저 자리에 쿠로오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텐데.
태양이 지지 않는 기나긴 낮이 지난 후에 갑자기 밤이 찾아왔다. 그날은 오이카와가 깨어난 날이었다. 쿠로오는 겨우 찾아온 밤에 감사하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다음날, 쿠로오는 오이카와가 살아났다는 것에 감사하며 지금껏 한 구석에 밀어두고 있던 마음을 모두 꺼냈다. 오이카와를 밖으로 나가게 해줘야 한다는 마음은 오이카와가 웃을 때마다 쿠로오의 안에 쌓여 먼지만 쌓였고, 오이카와의 앞에 서서 싸워야겠다는 마음은 오이카와가 괜찮다고 할 때마다 더 깊은 곳으로 굴러 떨어졌었다. 하지만 이제 마음들과 마주하고 행동해야 했다. 오이카와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꺼내야 할 시기였다.
마음을 먹자 어려울 것이라고 쌓아두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센터는 새 가이드를 주겠다고 하면서 적합률 검사를 하러 나오라고 했다. 적합률 60%. 낮지도 높지도 않은 그저 적당한 수치였다. 센터는 오이카와의 적합률을 탐냈지만, 쿠로오는 오이카와를 일반인으로 살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일반인으로 만들어 줄 수 없다면 센티넬을 그만 두겠다고 하자 센터는 그제야 그것까지만 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처럼 잘 해준다면 오이카와의 빈자리는 없을 것이니 오이카와를 찾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받은 후에야 쿠로오는 센터를 떠났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오이카와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한 자신과의 약속이. 제 이기적인 사랑은, 다시는 무력하게 오이카와를 잃고 싶지 않다고 외치고 있었다.
쿠로오는 다음 날부터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치안이 좋고,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적당히 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 적당히 주변에서 관리를 해서 청소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해서 금방이라도 뽀송뽀송하게 마를 수 있을 것 같은 곳. 오이카와가 지나가듯 말했던 집이었다. 먼 미래에 센티넬과 가이드를 은퇴하면 함께 살자고 했던 곳. 센티넬로 살면서 벌었던 돈이 많아서 쿠로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하는 집이라도 살게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의 목숨 값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하찮고, 저렴했으나 작은 선물이기에 받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가구는 취향에 따라 들여놓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원룸에도 있을 법한 침대와 식탁 같은 것들만 채워두었다. 지금의 쿠로오가 고르면 쿠로오의 취향이 들어가 버릴 테니까. 가만히 집 안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금만 더 있다가는 마음 한 자락이 떨어져 자리 잡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쿠로오는 허겁지겁 오이카와의 집을 나섰다. 새 집에서는 행복만 가득 하기를.
오이카와가 밤에 병원에 와 달라고 해서 일부러 낮에 가서 가만히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꿈을 꾸지 않아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었다. 오이카와가 다치는 꿈을 꾼다면 쿠로오도 그것을 보게 되었을 테니까. 그것을 보고 자신을 무능하다고 더 탓하지 않아도 되니까. 오이카와가 일어날 무렵이 되면 쿠로오는 병원을 나와 센터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같이 살던 방에. 이제는 쿠로오 혼자 살게 될 방에 들어가 쿠로오는 밤새 짐을 정리했다. 오이카와의 옷, 오이카와가 밖에 나가서 기념품으로 사온 여러 가지 물건들, 오이카와가 가끔씩 들여다보며 안타까워하는 앨범, 그리고 오이카와를 향한 쿠로오의 마음까지. 자신이 준 선물도 넣어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기억해달라고 구질구질하게 붙잡는 것 같아서 모두 꺼냈다. 대부분은 버리고 몇 개는 챙겨서 기억할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좋은 가이드가, 아니 정말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고.
오이카와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짐을 뜯어내고 다 풀어놓을까봐, 쿠로오는 박스가 하나 완성될 때마다 오이카와의 집으로 보냈다. 오이카와의 물건은 사라져만 가는데, 방 안에 있는 오이카와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아서 쿠로오는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쓰던 물건들과 물건들에 대한 기억이 계속해서 쿠로오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여기에 있다고. 네가 치운다 해도 오이카와와의 기억은 항상 이곳에 있을 거라고.
오이카와의 상처가 나아갈수록 쿠로오는 조금씩 더 병원에 머물렀다. 쿠로오가 멋대로 끝을 내는 것이지만 조금은 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은 더 욕심내도 될 것 같아서. 쿠로오는 몸이 나아졌다며 가이딩을 해주겠다고 웃는 제 가이드의 호의를 거절했다. 한 번 가이딩을 받고 나면 결심한 것을 다 포기하고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먹은 마음인데 포기할까 보냐.
쿠로오의 물건과 가구만 남은 텅 빈 방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끊이지 않는 노크 소리에 쿠로오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센터 안에 있는 깊숙한 곳인데 누구일까. 센터에서 할 말이 있다면 먼저 전화로 연락을 했을 텐데. 쿠로오는 느릿하게 문을 열었다.
“얏호, 쿠로쨩! 서프라이즈! 오이카와 씨 퇴원했어!”
쿠로오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서 있었다. 오이카와는 쿠로오를 피해 열려진 문 사이를 훑어보고는 오이카와 씨가 없어서 쿠로쨩이 집에 신경도 안 쓰게 되었다며 투덜거렸다. 우리 둘이 사는 스윗홈. 그 말에 설레어 방에 들어갈 때마다 헤프게 웃곤 했었는데. 행복이 지금이 기회라며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바람에 쿠로오는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 밖으로 나가자.”
“그래, 방이 휑한 걸 보니까 새로 사서 채워 넣어야 할 것 같고! 쿠로쨩은 어떤 게 좋아?”
쿠로오는 오이카와의 말에 답하지 않고 앞장서서 걸었다. 오이카와는 환자는 오래 걸으면 안 된다고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쿠로오의 옆에 서서 걸었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온 것처럼 행동하는 오이카와를 보니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쿠로오는 의식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센터의 관리자에게 센티넬의 능력을 이용해서 말을 전했다. 예전에 말했던 대로, 해주세요.
쿠로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하자 심심했는지 오이카와가 조잘조잘 말했다. 오늘 식단은 뭐야? 맛이 없으면 우유빵 사먹을 거야! 아, 맛이 있어도 우유빵 먹을 거야. 오이카와 씨 우유빵 많이 못 먹었거든. 쿠로쨩 그런데 어디까지 가? 이쪽으로 가면 센터 출입문 있는 곳인데? 지금 사러 가? 쿠로쨩, 제어기는 제대로 착용 했어? 가이드 할까? 쿠로오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가슴 깊이 새기며 걸었다. 언제든지 꺼내어 볼 수 있도록. 깎여 나간다고 해도 마음 가운데 오이카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쿠로오가 묵묵히 걷기만 하는데도 오이카와는 쿠로오를 따라왔다. 가이드가 다치는 것을 방치하고 돕지도 못한 못난 센티넬이 가는 곳을 의심도 없이 걸었다. 쿠로오가 가는 곳을 따라왔다가 죽을 뻔 했다는 사실이 없었다는 사람처럼. 그러고 보면 오이카와는 깨어났을 때부터 쿠로오의 눈치를 봤었다. 오이카와는 쿠로오가 상처를 받지 않았는지 계속
눈으로 담으면서 말을 골랐다. 자신은 오이카와가 신경을 쓸 가치가 없는 사람인데도.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유리문은 쿠로오의 마음에 비하면 가벼워서 쉽게 밀렸다. 유리문을 지나치고 그 앞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쿠로오는 몸을 돌려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이제야 눈을 마주친다며 말갛게 웃었다.
“쿠로쨩? 왜 밖에 나와? 나오면 소리가 많이 들려서 피곤하다며. 아, 손잡고 싶어서 그래? 이렇게 행동 안 해도 손 잡아줄 수 있는데! 말하지 그랬어, 쿠로쨩!”
“지금까지 고마웠어, 오이카와. 정말 고마웠어. 잊지 못할 거야.”
“쿠로쨩?”
“다른 가이드한테서 가이딩을 받기로 했어. 센터도, 그 가이드도 동의했어. 그러니까 오이카와, 넌 이제 내 가이드가 아니야. 자유야. 밖에서 하고 싶었던 것들 다 하고 살아.”
“쿠로쨩? 이거 몰래 카메라야? 응? 오이카와 씨 상처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훈련에 들어간 거야? 그래서 밖에 센터 관계자가 이렇게 많은 거야? 오이카와 씨는 좀 다쳤었긴 해도 쿠로쨩이 위기라면 다시 쿠로쨩의 앞에 설 거거든! 그러니까 이런 실험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치기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 해도, 난 쿠로쨩을 지킬 거야!”
그래서 안 돼. 쿠로오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혀를 씹었다. 오이카와한테 잡혀있는 팔이 얼얼했다. 평소에는 손자국이 남는 것도 모자라 멍이 든다며 항상 살살 잡아주던 오이카와인데 힘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 같았다. 힘도, 체력도, 기술도 쿠로오는 무엇 하나 오이카와보다 뛰어난 게 없었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배로 노력해야 했고, 전투능력이 없다시피 한 쿠로오 때문에 수없이 다쳤다. 그러다 이번에는 오이카와를 사지로 보낼 뻔했다. 아니, 보냈다. 쿠로오는 안전한 곳에서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숨이 넘어가는데, 옆에 있지도 못했다. 이번에 오이카와가 산 것은 그저 운이 좋아서였다. 다음에도 운이 좋다고 확신할 수 없을뿐더러, 아무리 사회에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오이카와를 잃을 수는 없었다. 쿠로오는 전투에 재능이 없는 센티넬이기에 지켜줄 수도 없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생각해 본 결과, 오이카와가 다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페어 해제뿐이었다. 거기에 쿠로오는 이미 가이드와 오래 떨어져 본 경험도 있었고. 센티넬이 되었다는 결과를 받아들었을 때처럼 담담하게, 쿠로오는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오이카와에게 이별을 고했다.
다행스럽게도 오이카와는 센터보다는 항상 밖을 더 좋아했다. 쿠로오에게 미안하다는 듯 쿠로오의 일정을 물으며 소꿉친구 이와이즈미의 학교 행사에 참여했고, 이와이즈미가 큰 시합을 할 때면 시합을 보러 갔다. 웃는 얼굴로 나갔고, 즐거운 얼굴로 사진과 함께 돌아왔다. 가끔 유명한 곳에서 포장해온 음식을 내밀기도 했다. 거기에 다치기 전에는 후배의 학교 행사에서 선배로서 돈을 쓰고 올 거라며 자랑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오이카와가 센터에 있는 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 연인이 된 쿠로오 때문일 것이다. 쿠로오 때문에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센터에 묶여있는 거라면, 오이카와를 보내 주는 게 옳았다. 오이카와가 다치기 전에 결심했어야 했다.
“오이카와를 집까지 데려다 주세요. 이제 제 가이드가 아니니까 센터에 들여보내지 마시고요.”
“쿠로쨩?”
오이카와가 시선을 맞추려고 열심히 고개를 움직였지만 쿠로오는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시선이 맞지 않아 당황했는지 오이카와는 쿠로오의 어깨를 세게 쥐었다. 아릿한 감각에 쿠로오가 눈을 찌푸리자, 오이카와의 손에 힘이 빠졌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대기하던 사람들이 몸으로 벽을 만들었다.
오이카와와 떨어진 쿠로오는 센터 유리문으로 몸을 돌렸다. 이 방향으로 빠르게 간다면 이 힘든 시간을 금방 끝낼 수 있을 텐데 쿠로오의 발걸음은 하염없이 느렸다. 쿠로오한테서 떨어진 미련이 바닥에 달라붙어 쿠로오를 당겼고,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쿠로오를 불렀다. 그래도 가야 했다. 센터의 사람들이 오이카와를 거칠게 다루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오이카와의 아프다는 목소리를 들으면 지금까지 온 길을 한달음에 돌아갔을 테니까. 등 뒤에서 오이카와가 소리치는 말들이 들렸다.
“이거 놔! 난 쿠로쨩의 가이드야! 가이드가 다친 경험 때문에 센티넬이 충격에 휩싸여 평소라면 안 할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거라고! 센티넬이 아플 때 제일 필요한 건 가이드라는 걸 몰라? 나한테 손만 대 봐! 나중에 어떻게 될지 보자고!”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다가오는 것 같아서 쿠로오는 발을 재게 놀렸다. 센터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숨이 찼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이 괴로워져서 유리문 앞에 잠시 서 있기로 했다. 괜찮아, 오이카와는 저분들이 잘 데려다 주실 거니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쿠로쨩! 내가 더 잘할게! 자신만만하게 나가지도 않고, 조심하면서 다닐게! 운동도 더 열심히 해서 체력도 더 기르고, 다른 것도 더 배워서 뭐든지 다 잘할게! 그러니까 오이카와 씨가 필요 없다는 소리만 하지 마. 응? 오이카와 씨의 재능은 오늘부터 피어날 수 있다고!”
“미안해.”
“쿠로쨩, 우리 적합률은 센터 최고잖아. 95%라고? 숨만 쉬고 있어도 다른 페어보다 더 뛰어나. 그리고 이번에 다쳤던 건 운이 조금 안 좋았던 것뿐이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쿠로쨩!”
“내 욕심이지만, 행복해줘, 오이카와.”
“쿠로쨩이 지금 이 문만 열어주면 행복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문 열어, 쿠로쨩! 나 보고 이야기 해! 쿠로쨩? 쿠로쨩!”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아서 쿠로오는 센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쿠로쨩-이라고 불러주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좋아서 걸음이 느려질 뻔 했지만, 조금만 더 있다가는 오이카와에게 약해서 미안하다고, 쓸모없는 능력이라 정말 미안하다고, 자신이 다 잘못했다고 빌면서 다시 가이드를 해달라고 할지도 모르기에 쿠로오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내딛었다. 걸어 나갈수록 눈물이 났다. 눈물에 앞이 흐려져 오이카와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함께 센터에서 지내던 날들이 눈물 위로 올라와 쿠로오를 미소 짓게 했다. 이 기억만으로도 오이카와의 가이딩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다. 평생을 혼자 지낼 수 있다. 쿠로오는 그렇게 되뇌며 오이카와와 함께 쓰던 방까지 걸었다. 이제 쿠로오의 방이다. 온전한 쿠로오의 공간. 자각한 사실에 쿠로오의 입술 위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웃음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는 게 거북해서 쿠로오는 커튼을 닫았다.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이카와가 보고 싶었다. 처음엔 오이카와를 도울 수 없는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센티넬이라는 것이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유용하지만 중요하지는 않은 센티넬이라서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밖으로 보내줄 수 있었다. 앞으로는 자신 때문에 다치지 않기를, 아픔을 숨기고 괜찮다고 웃지 않기를, 울지 않기를. 오이카와가 계속해서 떠올라 쿠로오는 귀걸이의 제어력을 더 높이고 몸을 웅크렸다.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태어날 때부터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자라면서 유치원생, 초등학생, 중학생이라는 단계를 밟아나가도 오이카와 토오루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했다. 외모도 완벽했고 성격도 좋았다. 또 소꿉친구도 있었다. 그렇기에 오이카와는 자신의 존재가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이 없다면 이렇게나 오이카와에게 친절한 세계일리가 없을 테니까. 오이카와는 소꿉친구와 함께 배구를 하는 고등학교에 가고 졸업하고 대학을 갈 예정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듯이.
그러나 순탄한 오이카와의 삶에 예기치 못한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가이드였다. 누군가의 삶을 돕는 것이 필수인 가이드. 혼자서도 잘 살아남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가이드라는 라벨링이 된 순간부터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사람은 가이드라는 큰 그늘에 가려서 사라진다. 오이카와는 그래서 가이드 검사에 양성 판정이 나왔을 때부터 삶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까지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얼음 위에 있었고, 얼음에 균열이 가서 차가운 물속에 빠진 것만 같았다. 차가운 급류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다보니 빠졌던 구멍조차도 찾을 수 없는 나날들. 조금만 가라앉아도 빛이 보이지 않던 날들은 너무 괴로웠다. 오이카와는 신을 찾았고, 저주했고, 울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아니 가족의 힘과 소꿉친구의 힘을 다 모아도 이 사회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오이카와는 꿈만 꾸게 되었다. 그리고 바랐다. 적합한 센티넬이 없기를, 아니면 적어도 빨리 죽어서 조금이라도 감옥 같은 센터에서 일찍 나올 수 있기를.
센터에 가는 날에도 오이카와는 꿈을 꿨다. 가이드 양성 검사가 오류가 난 것이었다고. 그래서 가이드라는 이름에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고 해주길 바랐다. 오이카와가 나사가 풀린 것처럼 위태위태하게 다녀오겠다-라고 말하자, 소꿉친구 이와이즈미는 수도에 있는 센터 앞까지 같이 와 주었다. 자신이 센티넬이었다면 오이카와를 혼자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울음을 삼키고 옆에 있어주었다. 물론 떨어지게 되었지만.
그리고 오이카와는 쿠로오를 만났다. 첫인상은 ‘손수건도 가지고 다니는 특이한 애’였다. 하지만 센티넬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오이카와는 눈앞에 있는 쿠로오도 조금 불쌍해졌다. 양성 반응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밖에서 날던 새가 새장 안에 갇히는 꼴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이것저것 말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오이카와 자신이 더 즐거워졌다. 이와이즈미가 한 대 때리면서 주위를 환기시키는 것과 달리, 쿠로오는 끝까지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다. 팬이 되고 싶다고 하기에 오이카와는 속 안에 있던 것까지 다 끄집어냈다. 가이드 같은 것 하고 싶지 않다고. 소꿉친구 이와이즈미한테도 한 적이 없는 말이었다.
오이카와는 센터에서 검사를 다시 받았을 때, 다시 양성 반응이 나와서 좌절했다. 그리고 적합률이 좋은 센티넬이 있다는 말에 기다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부터는 허탈했다. 센티넬의 기분에 따라 그 센티넬을 볼지 말지를 정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벌써부터 오이카와 토오루는 없어지고 가이드만 남았구나. 마음에도 안 드는 가이드가 된 김에 오이카와는 자신의 센티넬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실컷 심술을 부릴 거라고 생각했다. 생존을 위해 옆에 둬야 하니까 심한 대우는 할 수 없겠지. 그러면 센티넬보다 더 예민한 가이드가 되어 주겠어! 그렇지만 오이카와의 그 목표는 비행기로 접혀 하늘을 날기도 전에 탁자위에 버려졌다. 오이카와의 센티넬이라는 사람이 아까 손수건을 건네줬던 그 애였으니까. 새로운 장소에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안하다고 말하는 통에 오이카와는 웃어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애라면 가이드도 조금 재미있을 것 같다고.
그렇지만 센터에서의 교육은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쿠로오가 연습을 할 동안 오이카와는 5분 대기조가 되어 쿠로오 옆에서 몇 미터를 떨어질 수 없었고, 쿠로오가 자유시간이 될 즈음에야 오이카와는 따로 불려가 가이드 교육을 받았다. 센티넬을 위한, 센티넬을 신경 쓰는, 센티넬을 아끼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기에는 너무 지루했다. 햄스터한테 가이드라는 이름을 주고, 손에 머물러 있으면서 가이딩을 하게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아니면 기계에 프로그래밍을 해서 안드로이드 가이드를 하나 만들던가. 센터는 사람을 틀에 넣어서 마음에 드는 가이드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눈만 굴리면 갇혀 있는 게 보여서 갑갑했고, 고개를 돌리면 오이카와 토오루를 위한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서 미쳐버릴 것 같은 그 때, 오이카와의 센티넬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저 말을 들을 당시에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상황이 변했다. 사람 취급을 받는 센티넬은 건의를 하면 받아들여지고, 센티넬의 부속품인 가이드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는 현실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는데도 그래도 기뻤다. 더 이상 좁은 우리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오이카와는 쿠로오의 친절에 고맙다고 했고, 쿠로오는 잘 되었다며 웃었다. 당시에는 기뻐서 좀 울었던 것도 같지만, 나중에 오이카와가 자서전을 적게 된다면 오이카와는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랑에 빠지는 소리가 났다.]라고.
저 날 이후로 오이카와는 쿠로오에게 조금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손수건을 빌려주는 친절한 애에서 자신의 센티넬이라고 조금 단계가 높아진 게 그 이유였다. 그리고 미야기로 돌아온 후, 오이카와는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센터에서의 일을 잊었다. 이와이즈미와 함께 가는 학교는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했고, 교복은 예뻤고, 배구는 항상 그렇듯 즐거웠다. 센터에서 교육을 위해 보내는 책자는 모두 방구석에 처박은 채로 학교생활을 즐겼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이름으로 사는 삶은 행복해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의 기분이 현실로 끌어내려져 온 것은 방학 때로, 센터로 가야 하는 시기였다. 오이카와의 텐션이 내려가자 이와이즈미는 우유빵을 하나씩 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우유빵을 먹어도 맛있지가 않아서, 더 우울해졌다. 그리고 센터에 간 날, 오이카와는 수척해진 쿠로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때서야 깨달았다. 오이카와는 밖에 갈 수 있지만 쿠로오는 계속해서 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임무가 없으면 센터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오이카와는 쿠로오와 메일을 교환했다. 쿠로오가 밖에 나올 수 없다면 자신이 밖의 일을 보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오이카와는 센터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했다. 나를 행복하게 해준 너도 조금은 행복해지기를. 오이카와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오이카와가 돌아갈 무렵 쿠로오의 얼굴은 윤이 흘렀다. 메일을 자주 하면 쿠로오도 항상 이런 표정으로 지낼 수 있겠지. 저 때의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로 돌아온 후, 쿠로오와 메일을 자주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다음에 만날 때는 다크서클이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오이카와는 당황했다. 쿠로오는 메일을 많이 보내지 않았고, 오이카와의 등교시간이나 취침시간 30분 전 정도에만 메일을 보냈다. 그 시간이 지나면 메일이 아예 오지 않기도 했다. 나중에 오이카와가 바쁜 일이 있었는지 물으면 늦잠을 자서, 혹은 일찍 잠들어서 시간을 놓쳤다고 할 뿐이었다. 쿠로오의 행동이 이상한 것 같아서 오이카와는 센터에서 온 책자도 다 펴봤다. 하지만 나오는 말은 항상 같았다. 센티넬은 가이드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데 얼마나 쓰냐면 센티넬은 가이드의 안전이 최우선이라 자신의 눈에 닿지 않는 곳에 있으면 화를 낸다고. 혼자 둬야 할 상황이라면 최고의 보안이 보장되어 있는 감옥에 넣어둔다고. 가이드를 물건으로 보는 거야 뭐야. 오이카와는 기분이 나빠져서 항상 책자를 던졌다. 하지만 조금 씩씩거린 후에 다시 펴곤 했다. 쿠로오가 자신에게 신경을 더 많이 써준다면, 자신도 조금 더 써주고 싶었다. 쿠로오가 아무리 특이하고 조금 설렁설렁한 것 같아 보인다고 해도 배려는 충분히 받고 있으니까.
두 번째로 센터에 갔을 때는 입을 열면 김이 나오는 찬 겨울이었다. 오이카와는 작년에 센터에 왔을 때가 떠오른다며 몸을 떨었다. 팔을 걷으며 소름이 돋은 게 보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오이카와의 투덜거림에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 겨울은 특히 더 추운 것 같다며 조심하자고 했다. 그러니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자신이 훈련하는 곳으로 오지 말고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방이 넓으니 방 안에서 뒹굴 거려도 되고, 방 안에서 배구 연습을 해도 될 거라고 말했다. 날을 잡아서 복도를 깨끗하게 청소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면서. 하지만 혼자 방에서 지내는 것과 복도에서 홀로 서브를 넣는 것은 너무나 심심했다. 마치 자율성이 있는 수용소 같았다. 그래서 쿠로오를 따라다니려고 열심히 다녔지만, 센터 안은 너무나도 넓어서 오이카와는 자주 길을 잃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센터에 상주하는 도우미들이 오이카와를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오늘은 방 말고, 쿠로쨩이 있는 곳에 가보고 싶은데.”
너무도 한가한 일상이라 툭 던져본 말이었건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굉장히 기뻐했다. 그리고 금방 쿠로오에게 갈 수 있다며 어디서 훈련을 하고 있는지 연락하겠다고 했다. 도우미를 따라 쿠로오가 있는 곳으로 가던 오이카와는 쿠로오가 숨기고 싶던 것을 듣게 되었다. 얼마나 가이드를 못하면 가이드가 있는데도 방에 두고 다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적합률 95%는 운이 아니었는지 비웃는 소리들. 보통의 청각을 지닌 오이카와도 들을 수 있는데, 쿠로오는 못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오이카와는 제 친구가 이런 소리를 듣고 다닌다는 것에 화가 나서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 씨는 엄청 좋은 가이드라서 하루에 한두 번 손만 잡아도 가이딩을 할 수 있어서 그래. 아니, 사실 하루에 한두 번도 필요 없어. 오이카와 씨는 계절마다 와도 완벽할 걸? 적합률 95%라니까 좀 괜찮지 않을까? 아, 사실 간이검사에서도 80% 밑으로는 안 내려가 봐서 잘 몰라. 그래서 그 아래는 내가 모르니까 그 아래면 정말 미안하고.”
오이카와의 도발에 몇몇 센티넬이 화를 참지 못하고 이를 드러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보였으나 오이카와의 옆에 있는 안내자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말만 하는 녀석들. 오이카와가 불쌍하다는 듯 센티넬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 옆에 있는 가이드에 눈이 갔다. 부러워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무엇이 부러운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서 가자는 길잡이의 재촉에 오이카와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나중에 단체교육을 받으러 모였을 때 말을 나눌 기회가 생겼는데, 센티넬을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밖에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뤘다. 쿠로쨩한테 밖에 나가고 싶다고 하니까 나갈 수 있게 다 해놨던데? 오이카와는 사실만을 말했지만 다른 가이드들은 더 알고 싶어 했다.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면서 기억을 더 해달라고 말했다. 아, 처음 만났을 때 울었어. 오이카와의 덧붙임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구석에 있던 사람이 “선택받은 가이드는 똑같은 것을 해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거지.”라고 말하자 오이카와를 가운데에 두고 둥글게 둘러싼 가이드의 벽이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혼잣말의 조각들이 오이카와의 귀에 잘그락거리며 들어왔다. 역시 운이 좋은 사람은 따로 있나 봐, 내 센티넬도 오이카와의 센티넬처럼 날 위해주면 좋을 텐데, 내 센티넬이 쿠로오였다면 좋았을 텐데, 나도 밖에 나가고 싶어.
오이카와의 두 번째 방학은 주변의 소리와 눈빛 때문에 신경만 긁혔다. 제 센티넬에게 말 못하는 가이드들이나 시비를 거는 센티넬들의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잠시 센터를 떠났다가 올 수 있지만 쿠로오는 아니니까.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센티넬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전까지 계속 센터에서 살아야 할 테니까. 제 센티넬을 위한다는 희생정신이나 사랑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친구니까. 친구가 방학 때 만나는 친구를 걱정하는 게 뭐가 어때서. 오이카와는 그렇게 자신을 눌렀다. 거울을 보고 꾹꾹 눌러 담아도 오이카와 씨는 표정도 완벽하다며 자화자찬을 하고 쿠로오를 만나러 갔지만, 쿠로오는 뭔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오이카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럴 때마다 오이카와는 쿠로오가 정신계 센티넬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미안하다고 말이 입만 열면 쏟아질 표정이면서 말도 못하고, 가이딩을 먼저 해달라고 말도 못 꺼내는 제 페어를 보던 오이카와가 괜히 춥다며 손을 잡기를 요구했다.
“역시 겨울은 싫어. 춥잖아. 쿠로쨩, 손 잡아줘.”
“춥지 않게, 매일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손끝으로 따뜻함이 옮겨갔다. 손이 닿은 부분이 뜨거운 것 같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손만 잡고 있는데도 미소가 귀까지 걸린 쿠로오를 보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오이카와 씨는 아주 춥고, 아주 더운 때만 센터에 오는 걸. 날씨가 좋으면 쿠로쨩은 오이카와 씨 못 볼지도.”
“괜찮아.”
무엇이? 오이카와가 물어보려고 했지만 쿠로오는 괜찮다는 말만 한 번 더 되뇌고 이제 들어가자며 손을 잡아끌었다.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무엇이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했으나 쿠로오의 저지가 계속 한발씩 빨랐다. 밥 먹으러 갈래? 따뜻한 물로 샤워하자. 피곤하니까 자자. 쿠로오가 계속 회피하려는 행동을 하니 먼저 두 손을 든 건 오이카와였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궁금하다고 계속 물어보는 건 실례되는 행동일 테니까. 그렇지만 조금씩 의문이 생겼다. 센티넬이 가이드를 속박한다는 건 사회적으로 주입받은 결과는 아닐까 하고. 그래서 다른 센티넬은 가이드를 편하게 억압하고, 가이드들은 센티넬의 편함에 소음을 내기 싫어서 따르고. 쿠로오는 그렇지 않은데. 오히려 쿠로오는 제가 없어도 잘만 생활할 것 같아 보이는데.
그리고 며칠 후, 오이카와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쿠로오와 헤어지기 전에 이번엔 꼭 전국대회에 와서 배구를 엄청 잘하는 가이드로 이름을 날릴 거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방학 때 배구를 못해서 잘 할 수 있겠냐는 쿠로오의 장난에, 오이카와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센스는 중학교 때부터 갈고 닦아서 반짝반짝하고, 재능은 이미 꽃피워서 아름다우니 강한 팀을 만들 동료만 있으면 우승할 수 있다고.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쿠로오의 웃음 뒤로 다른 가이드들의 시선이 뾰족하게 꽂혀서 오이카와는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오이카와를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은 행복하다고 자위하는 가이드들의 눈을 보고 싶지 않았다.
“오늘 정리 끝나고 라멘집 가자! 오이카와 씨가 살게! 오이카와 씨 월급 들어왔거든!”
“단기알바인줄 알았는데 월급이었어?”
“그러면 매달 쏘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난 차슈 곱빼기.”
“난 거기에 만두 추가.”
“그러면 빨리 정리하고 가자고!”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의 발놀림이 빨라져 오이카와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도 뒷정리하기 힘들어 보이는 날이면 라멘 사면 금방 하겠네.
“오이카와.”
“이와쨩, 주문하려고? 이와쨩은 뭐 먹을 건데?”
“그것보다, 너 괜찮냐?”
“뭐가?”
“낮에 전화 왔었다면서. 그-, 거기에서.”
“센터? 이건 다른 거야! 돈이 들어왔으니까 쓰는 거라고! 방학 때 배구 못하는 대신 돈 버는 거지! 헉, 오이카와 씨 벌써 사회인일지도!”
“그러면 정리 빨리 하고 가자.”
툭 치고 지나가는 이와이즈미를 쫒던 오이카와의 시선이 잠깐 아래로 내려갔다. 오늘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이렇게 다시 떠올리게 되다니. 그래도 오이카와는 소꿉친구의 친절이 떠올라서 웃었다. 센터라고 말도 못하고 거기래! 센터 이름도 못 외우는 바보 이와쨩! 오이카와는 웃다가 결국 입 밖으로 생각을 내뱉었고, 그 뒤에 이와이즈미의 응징이 돌아왔다. 아프다고, 너무하다고 투덜거리는 동안에는 센터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수업 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처음으로 낮에 울린, 쿠로오 전용 벨소리였다. 드디어 쿠로오가 다른 시간에 연락이 하고 싶어졌다고 웃으며 순식간에 복도로 달려가서 전화를 받았다. 쉬는 시간일까? 훈련이 힘들다고 투덜거리려고 전화한 걸까? 개교기념일이라고 착각하고 전화한 거면 놀려줘야지! 몇 가지 상황을 상상하고 전화를 받았지만, 오이카와가 생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시끄럽게 비상벨 같은 것이 울리고 있었고, 비명소리도 들렸고, 누군가가 달리는 소리와 괜찮은지 묻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이카와는 그 소리에 당황했지만, 전화를 건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쿠로쨩. 그 순간, 비명이 멎었다. 쿠로쨩. 균일하지 않게 들려오던 숨소리도 멎었다.
주워들은 것으로 상황을 판단한 오이카와의 머릿속에는 사고와 폭주라는 단어로 가득 찼다. 떨어져 있어서 큰일이 난 건 아닐까? 괜찮다고 해도 곁에 있어야 했나? 숨소리가 안 들리는데 기절한 건 아닐까? 지금 만나러 가야 하나? 오이카와는 쿠로오가 답하기를 바라며 계속해서 쿠로오를 불렀다. 이름 한 번에 막혔던 숨을 쉬는 소리가 들리고, 호칭 한 번에 호흡을 가다듬는 낌새가 느껴지고, 별명 한 번에 오이카와의 이름이 불렸다. 그리고 쿠로오는 당황한 것처럼 전화가 왜 연결이 되었는지 말하더니, 훈련하는 중이라고,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오이카와는 기가 차서 전화를 다시 걸었지만 착신이 되지 않아 그대로 교실로 돌아갔고, 점심시간에 장문의 메일을 받았다. 축약하면 위험한 일이 생긴 건 절대 아니고 핸드폰을 두고 훈련에 들어가려다가 미끄러졌는데 뒤로 넘어졌고, 넘어지는 동안 손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새 능력이 깨어나서 자신도 모르게 0번을 눌렀다는 것이었다. 넘어진 곳이 기계가 가득한 곳이라 침입이라 간주해서 사이렌이 울렸고, 연구원들이 걱정하는 소리가 들린 것이라고. 그리고 놀랐을 거니까 맛있는 것이라도 사먹고 가라며 덧붙여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세 번을 더 읽고 답장했다. 항상 핸드폰은 켜두고 있으니까 새 능력을 자랑하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그리고 기다릴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배구부 주장이 될 재목이라 친구의 고민이 하나쯤 추가되어도 여유만만이라고. 거기엔 고맙다고, 나중에 우유빵을 꼭 사겠다는 답이 왔다. 오이카와는 그 메일을 보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우유빵 하나로 오이카와 씨를 쓰려고 하다니 오이카와 씨를 너무 하찮게 보는 거 아니야? 나중에 쿠로쨩한테 투덜거려야지.
“야, 오이카와.”
“응? 왜? 뭐? 무슨 일 있어?”
“아니, 라멘 나왔는데 가만히 있어서.”
“산다고 해놓고 돈이 부족한 거야? 괜찮아, 이번엔 내가 사면 돼.”
오이카와의 눈에 같은 학년 배구부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잠깐 딴 생각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오래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굴리며 어떻게 이야기해야 완만하게 수습될지 ‘잠깐’ 고민했다.
“쿠로쨩한테 사진 찍어서 보내줄까 하고! 훈련생의 식사는 급식이니까!”
“오, 그러면 내 것도 찍어서 메일로 줄게. 같이 보내줘.”
“내 것도. 그런데 오이카와, 네 메일 주소가 뭐더라?”
“나도 메일 주소 좀 알려줘.”
“뭐어? 예전에 주소 받아갔잖아!”
“잊어버렸어.”
좀 더 오이카와 씨를 소중하게 대해 달라고! 오이카와의 외침에 아오바죠사이 2학년 배구부원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배구에만, 그리고 친구들한테만 신경 쓰는 평범한 고교생의 삶. 센티넬 쿠로오는 이제 가질 수 없는 평범한 일들. 그래서 오이카와는 조금씩 자신의 생활을 메일로 보냈다. 등굣길도 찍었고, 점심도 찍었고, 학교도 찍었고, 배구를 하는 체육관도 찍었고, 멋있는 서브를 넣는 모습은 동영상으로 찍었다. 그렇게 연락하다 간 여름엔 쿠로오가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고 있어서 괜히 뿌듯했다. 얼마나 뿌듯한지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친절한 오이카와 씨의 학교생활을 보면서 같이 학교에 다니는 느낌을 받은 건 아닐까. 그래서 작년에 비해 얼굴에 생기가 도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조금 더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삶을 간접체험이라도 할 수 있도록.
그 해 겨울, 오이카와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센티넬이라서 쿠로오에게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좋아해서, 조금 더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눈치를 보고 먼저 손을 내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전의 일들을 되돌아봐도 명확했다. 스팸전화가 걸려서 수업에 방해가 되어 눈치를 받아도 계속해서 핸드폰의 소리를 최대로 해둔 것. 쿠로오 전용 벨소리가 있는 것. 쿠로오에게 자신을 좀 더 알아달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한 것. 쿠로오가 안 되어 보일 때마다 먼저 다가간 것. 심문하듯 쏘아 붙이면 다 들을 수 있는데도 쿠로오가 웃는 모습을 보고 그냥 넘어간 것. 그리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락하는 것.
더 떠오를 것 같은 기억을 누르려고 쿠로오가 잠자는 것처럼 베개에 얼굴을 묻고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이렇게나 좋아하는 티를 냈는데 어떻게 한 번도 안 떠봐? 쿠로쨩 연애 못해본 건 아니야? 아니, 연애는커녕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 있기는 해? 갑자기 솟구친 울분에 오이카와가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깨달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답답해할 수도 있지! 그야 오이카와 씨인걸! 좋아하는 것보다 사랑받는 게 더 익숙한 오이카와 씨인 걸! 오이카와 씨는 예쁘니까! 멀리서도 딱 보면 오이카와 씨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예쁘니까! 그게 당연했는데! 그러니까 쿠로오도 알고 좋아하는 티를 내줬어야 했는데! 현실은 가이드를 멀리하는 센티넬이고 말이야. 오히려 가이드가 없어도 잘 사는 센티넬 1호로 센터 내에서 유명한데, 날 좋아하기는 할까? 문득 찾아온 의문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털어냈다. 지금 싫어한다고 해도 시간을 들여서 좋아하게 만들면 돼. 엄청난 가이드가 되어서 누구나 다 부러워하는 그런 위치에 서고 인정을 받으면, 반대쪽으로 기울어진 마음도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더 노력하면 돼. 오이카와는 그렇게 두 번, 세 번 말했다.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어이, 오이카와. 너 대학가도 배구 해?”
“아니? 센터에 들어가서 쿠로쨩이랑 페어할 거야!”
“네 센티넬이라면 대학도 가라고 할 것 같은데.”
“쿠로쨩이 가라고 해도 내가 안 갈 거야. 고등학교 때까지만 나를 위해 살고, 그 뒤로는 쿠로쨩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했거든.”
난 쿠로쨩이 정말 좋아! 오이카와는 마지막 말을 삼키고 웃었다. 말했다가는 소꿉친구한테 자랑하지 말라고 맞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맞는 소리가 난다면 하나마키는 분명 오이카와가 맞을 짓을 했다며 라멘이나 사라고 할지도 모른다. 일어날 일이라면 피하는 것이 상책! 오이카와는 한층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못한 말을 가슴 안에 넣었다. 그리고 시선을 맞춰보려고 고개를 들자,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이와이즈미와 눈이 마주쳤다. 이와이즈미는 당황한 것처럼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다가, 콧등을 긁으며 입을 열었다.
“네 센티넬은 꽤 괜찮은 놈인 것 같아.”
“괜찮은 게 아냐. 정말 좋아! 이와쨩보다 더 좋아!”
“망할카와!”
“이와쨩, 때릴 거야? 때릴 거면 옷으로 가려지는 곳을 때려! 다음 주에 쿠로쨩 보러 간단 말이야. 쿠로쨩 걱정한다고!”
오이카와는 눈을 꼭 감고 등을 내밀었다. 면적이 넓어서 회피도 못하고 다른 곳에 맞는 것보다는 좀 더 아프겠지만, 옷으로 확실히 가려지고 쿠로오에게 의도적으로 안 보이게 해도 의심받지 않는 위치니까. 그러니까 에이스 스파이커한테 등 정도는 맞아도 괜찮아! 괜찮았다. 맞아서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힘 조절도 해주고 이와이즈미도 이제 다 컸어.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는지 이와이즈미의 발걸음이 절 향하는 걸 보고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피해 달렸다. 얼마나 생각을 깊게 했으면 말이 나왔겠어! 거기에 이건 칭찬이라고, 이와쨩!
3년 동안의 배구. 내로라하는 성과는 없었지만 항상 즐거웠다. 한번쯤은 전국대회에 출전해서 쿠로오의 응원을 받고 싶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전심전력으로 배구를 했었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오이카와는 가이드 훈련에 매진했다. 다른 가이드들에 비해 꾸준하게 하지도 않았었고, 실전에 나가는 팀에 비하면 상당히 뒤쳐져 있었지만, 오이카와가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재능은 꽃피우는 것, 센스는 갈고 닦는 것! 우수한 세터였던 오이카와가 하지 못하는 건 없었다. 배구로 다져진 체력은 항상 오이카와를 든든히 받쳐주었기에 오이카와는 사격과 격투에 온전히 신경을 쏟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오이카와는 가이드 이수교육을 모두 마치고 쿠로오와 페어가 되어 실전을 다닐 수 있었다. 훈련 결과는 물론 탑이었다.
물론 실전은 항상 연습처럼 잘 되진 않았다. 준비가 부족할 때도 있었고 시간이 촉박해서 자료를 모으기도 전에 잠입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큰 부상 없이 모두 완벽하게 끝내곤 했다. 쿠로오에게 전투적으로 기댈 부분이 없기에 오이카와가 완전에 완벽을 거듭한 덕분이었다. 오이카와가 찰과상이라도 생긴 날에는 눈도 못 마주치며 미안해하는 쿠로오가 있었기에 더욱 조심해서 상처가 없는 타입이기도 했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일들도 다 부딪치면 좋은 방향으로 결과가 나왔고, 무리라고 판단되는 일들도 기적처럼 성공해내곤 했다. 하지만 당연해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쿠로쨩, 빨리 가자. 오이카와 씨는 고등학교 후배가 하는 축제상점에 팔아주러 가야 하거든.”
“그래도 지원을 조금 더 받는 편이-.”
“쿠로쨩, 오이카와 씨 못 믿어? 너무해. 연인도 안 믿어주고 쿠로쨩은 너무해.”
왜 이게 지금 생각이 난담. 오이카와는 쓰게 웃었다. 이번에도 ‘당연하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적을 쫒아내는 것은 성공했다. 이제 지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눈앞이 자꾸만 흐려져서 오이카와는 눈에 힘을 줬다. 일어서야 하는데. 일어나서 쿠로오가 못 나오게 막아둔 걸 다 치워야 하는데. 오이카와는 기괴하게 꺾인 팔을 바라보다가 좀 성한 팔로 몸을 지탱해 일어서려고 했다. 일어설 수 없었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억지로 움직이면 움직이기는커녕 잘게 찢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쿠로오의 능력에 닿을 수 있게 파장을 맞춰 쿠로오를 불렀다. 파장에 흔들림이 전해지지 않도록 오이카와는 정신을 도미노처럼 똑바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하나도 넘어지지 않아서 지금 이 상황을 모르기를. 같이 온 팀원의 대부분이 죽었고, 이제 거의 죽을 위기에 놓였다는 것들을. 쿠로오는 연결이 되자마자 제 능력을 다 개방하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가 주려는 정보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면 오이카와가 이번 임무는 실패라고 결론을 내린 것도, 지금 오이카와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도 모두 다 알아버릴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느슨한 머리로 쿠로오가 읽지 못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생존에는 유리하지 않겠지만, 지금 쿠로오가 폭주하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 오이카와는 얌전히 눈을 감고 정신을 놓았다. 쿠로오가 아무리 노력해도 읽을 수 없도록. 지금의 제 상황을 알고 폭주하지 않도록.
오이카와가 눈을 떴을 때 쿠로오는 옆에 없었다. 당연히 옆에서 울고 있다가 자신이 일어난 걸 보고 왜 그랬냐고 탓하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웃어줄 줄 알았는데. 오이카와는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옆에 침대가 있어 쿠로오가 잠시 눈을 붙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구석구석을 바라봐도 쿠로오가 있을 만한 침대는 보이지 않아서 오이카와의 안에 걱정이 순식간에 들이찼다. 쿠로오가 옆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다친 건 아닐까? 자신이 쓰러지고 난 뒤에 쿠로오를 찾아내서 납치한 건 아닐까? 빌런들이 탈출하면서 불을 질렀고, 쿠로오는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서 중환자실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화재라면 중환자실 보다는 아마도-.
몰려오는 생각들이 너무 무서워서 오이카와는 억지로 팔을 뻗어 몸을 움직였다. 아파져라, 많이 아파져서 이 생각들 좀 어떻게 해 줘. 오이카와는 그렇게 빌었다.
“쿠로쨩?”
다친 몸을 일으키며 쿠로오를 불렀다. 시야가 높아져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닫혀 있는 문이 더욱 잘 보였을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머리부터 시작해서 전신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몇 번이고 쿠로오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 사실이 너무 무서워져서-.
-으아아아!!!
절규했다. 목소리를 내지 않고, 쿠로오와 이야기를 할 때처럼 정신으로 절규했다. 싫어, 아파, 싫어, 거짓말, 쿠로쨩, 아파, 죽을 것 같아, 쿠로쨩, 쿠로쨩, 쿠로쨩!
오이카와는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침대에서 굴렀다. 그리고 깁스가 없는 팔을 이용해서 포복을 하는 것처럼 문 앞으로 향했다. 생각이 맞을 리가 없었다. 분명 너무 피곤해서 잠시 쉬고 있거나, 지난 임무에 대해서 담당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라고 몇 번이고 자신을 안심시키는 것처럼 되풀이해서 생각했다. 사소해서 나중에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무섭지 않은 것들로 공포를 덮어보려고 했지만 한번 흘러내린 공포는 오이카와를 잠식했다. 몸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픈데도, 힘든데도 멈출 수 없었다.
“오이카와!”
먹먹하던 귀가 순식간에 제 기능을 찾았다. 오이카와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상대를 보려고 했다. 쿠로오의 목소리니까, 오이카와가 알고 있는 쿠로오의 목소리였으니까.
“쿠-, 쿠-. 쿠ㄹ-.”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쿠로오가 맞는지 확인해야 되는데 몸을 일으키고 볼 수조차 없었다.
“오이카와가 깨어났어요! 그런데 지금 발작을 하고 있어요! 누구라도, 이 목소리가 들리면 도와주세요!”
쿠로오의 목소리 위에 다른 소리들이 겹겹이 쌓였다. 오이카와는 제일 먼저 가라앉는 쿠로오의 목소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팔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잡고 있는 것처럼 멈춰있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서 쿠로쨩 눈물 닦아줘야 하는데. 오이카와는 까맣게 점멸하는 시야를 조금이라도 늦게 하고 싶어서 혀를 깨물었다. 봐야 눈물을 닦아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오이카와가 피를 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신이 말하는 것처럼 어린애 손자국 같이 조금씩 까맣게 되던 시야가 페인트를 붓는 것처럼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오이카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병원이었다. 새하얀 벽, 새하얀 침구, 새하얀 바닥. 눈이 시린 것 같아서 손을 들어 올리려다가 깁스를 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내 팔을 내렸다. 옆에 쿠로오가 있었다면 안심이 되었을 텐데. 그렇지만 오이카와는 이내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쿠로오는 병원에 있을 상태가 아니었다. 가이드의 상처에 놀라고, 오이카와가 난동을 피우는 것을 두 눈으로 봤을 테니까.
센티넬은 충격을 받으면 능력의 씀씀이가 커지고, 폭주하기 쉬운 상태가 되어 버린다. 쿠로오의 폭주는 주변의 소리가 쏟아지듯 들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일반인이 마취제를 투여하거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때리면 폭주가 멈추고, 홀로 조용한 곳에 있으면 능력을 조절할 수 있는 정도까지 안정된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 쿠로오가 오이카와의 옆에 없는 것이 옳았다. 사람이 적은 밤에 온다면 모를까. 이렇게 햇살이 쨍쨍한 낮에는 들릴 것이 너무 많았다. 거기에 쿠로오는 예전에도 홀로 밖에 나갔다가 폭주를 한 전적이 있었다. 그러니 걱정 될 수밖에.
“ㅋ-.”
쿠로쨩-이라고 입에 담아보고 싶었지만 목이 너무 버석했다. 물이라도 조금 마실 수 있었으면 입에 담아서 그리운 마음을 넣고 불러볼 수 있었을 텐데. 물을 떠올리자마자 오이카와는 지금 바로 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뜨거운 여름철에 사막에 아무 장비 없이 떨어진 방랑자가 된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키려다 포기하고 손을 뻗어 너스콜을 찾았다. 누르면 누군가가 와서 물을 주지 않을까.
오이카와는 조금 팔을 뒤적여 찾다가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물을 얻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자는 것이 낫다고 체념했는데,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힘겹게 눈을 뜨니, 오이카와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던 얼굴이 있었다.
“오이카와, 입 벌려.”
쿠로오의 이름은 부르지도 못한 채, 오이카와의 입에 물에 적신 거즈가 물려졌다. 생수통을 주는 것이 아니었기에 오이카와는 거즈를 빨면서 천천히 물을 보충했다.
“쿠로쨩, 심술부리는 거지?”
“얼마나 누워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쿠로쨩이 그리웠으니까, 하루?”
오이카와가 장난을 섞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쿠로오의 얼굴이 잠깐 밝아졌지만, 마지막 말을 들은 뒤에는 쿠로오가 입을 닫았다.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진 얼굴에, 오이카와는 덧붙일 말도 생각 못하고 굳었다. 얼마나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면 쿠로오의 얼굴이 이럴까. 이틀? 이틀 안 깨어났으면 저런 얼굴이 아닐 거다. 쿠로오의 야윈 얼굴을 보면 적어도 일주일은 일어나지 못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를 내뱉을 여유는 없다. 다른 주제로 관심을 돌려서 쿠로오가 혼자 있었던 시간의 무거움을 잊게 해야 한다.
“쿠로쨩, 낮 시간에 병원에 와도 괜찮아? 물론 쿠로쨩이 없었다면 물도 못 마시고 까무룩 다시 기절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쿠로쨩은 사람 많은 곳 싫어하잖아. 아, 손 줘! 가이딩 해줄게!”
오이카와는 환하게 웃으며 양 팔을 벌려 쿠로오를 마주하려고 했지만 한 팔에 깁스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다친 팔을 숨기려 밀어 넣었다. 한 손으로도 하는 가이딩은 조금 부족하겠지만, 오이카와 씨는 능력 있는 가이드니까! 하지만 계속 기다려도 쿠로오가 손을 잡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감았던 눈을 떴다. 부끄러워서 다가오지 못할 까봐 눈까지 감았는데, 쿠로쨩은 바보야.
“가볼게. 너스콜은 여기 있어. 나가면서 네가 정신을 차린 것도 말할게.”
쿠로오는 오이카와의 손에 너스콜을 쥐어주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쿠로쨩? 쿠로오의 눈을 보고 마주하고 달래서 가이딩을 할 예정이었던 오이카와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미 주변의 소음을 다 받아들여 오이카와가 물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채고 가져왔으면서 그냥 간다고? 가이드가 있는데 가이딩도 안 받고 돌아간다고?
오이카와는 눈앞을 흐리는 질문 너머로 쿠로오가 멀어지는 것을 봤다.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쿠로쨩! 내일도 올 거지? 밤에 안자고 기다릴게!”
쿠로오는 온다는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걱정하지 않았다. 예전에 자신이 입원했을 때처럼 쿠로오는 꼭 올 거니까. 그렇지만 달이 몇 번을 지고 해가 몇 번을 뜨도록 쿠로오를 보지 못하자 조금 불안해졌다. 혹시 오이카와가 정신을 잃고 있던 동안 쿠로오가 계속 기다리다가 정신을 혹사당한 건 아닐까 하고. 방 안에 웅크려 홀로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간호사가 오이카와의 상태를 체크하러 왔을 때, 오이카와는 전화라도 빌릴 요량으로 말을 걸었다. 쿠로오가 언제든 볼 수 있게 문자로 넣고 싶었지만, 타인의 핸드폰을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은 실례였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가 있으면 한번쯤 눌러 보겠지. 그러면 오이카와가 연락을 했던 걸 알게 될 테고. 간호사는 흔쾌히 핸드폰을 빌려주며 번호를 누를 수 있게 도와줬다.
“그런데 커다란 체격을 가진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에요? 찾아오지도 않는 사람한테 연락을 남겨야 하다니 상사인가 봐요.”
“커다란 체격? 혹시 이상하게 비죽 솟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에요?”
“맞아요. 매일 오는데 오이카와 환자님이 매일 잠을 낮에 몰아자서 자는 모습만 보고 가더라고요. 규칙적인 생활을 해주세요, 환자님.”
오이카와는 간호사의 말에 핸드폰은 이제 안 써도 될 것 같다고 사과의 말을 전하며 돌려줬다. 쿠로오가 만나러 오고 있다면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쿠로오는 오이카와가 다친 것을 보는 것이 힘들어서, 그리고 쿠로오가 걱정하는 얼굴을 하면 오히려 너무 팔팔하니까 지금 퇴원해서 임무에 나가도 괜찮다고 할 자신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행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쿠로오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빨리 나아야겠지.
오이카와의 몸에서 붕대가 많이 풀리고, 깁스도 조그만 것으로 바뀌자 쿠로오가 밤에 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이카와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물론 자는 척하고 실눈을 떠서 쿠로오가 있는 것을 보곤 했지만 그건 몰래 보는 것이고, 이건 마주볼 수 있는 거니까. 쿠로오는 의식적으로 병원과 최근의 임무에 대한 주제를 피하며 말했고, 오이카와도 그것들을 피하면서 말했다. 그렇기에 대화의 주내용은 어릴 적 이야기와 따로 있었던 시기의 이야기, TV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었다. 대화는 매우 즐거웠지만 쿠로오는 환자에게 수면시간이 중요하다며 금방 일어서곤 했다.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면서도 오이카와가 가이딩을 하고 가라고 손을 내밀면 타인과 대면하는 웃음을 얼굴에 가져다 쓴 채로 “다음에.”라고 말했다. 쿠로오가 나간 뒤에 오이카와는 괜히 자신의 몸을 보며 투덜거렸다. 왜 빨리 다 낫지 않아서 쿠로쨩이랑 오래 못 있는 거야.
병원에 오는 쿠로오의 안색은 항상 창백했다. 일이 없어서 대기를 할 때도 센터 안 특별히 격리된 공간 안에 있는 쿠로오에게 밖의 소음은 견딜 수 없는 것이라 그런 상태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의 병실에 매일 오는 것을 잊지는 않으면서 가이딩을 받는 것은 거절한다. 오이카와는 쿠로오의 저 고집이 자신이 다친 것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이라고 봤다. 쿠로오가 편하면 오이카와도 편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두 다리만 멀쩡했어도 가이딩을 거부하는 쿠로오 옆으로 달려가 손을 꼭 잡고 포옹을 할 텐데. 오이카와는 빨리 나아서 가이딩을 하고 싶었다. 쿠로오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옆에 있고 싶었다.
힘든 쿠로오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 오이카와는 몰래 퇴원수속을 서둘렀다. 치유계 센티넬의 진료를 받았더니 더 오래 치료해야 나을 수 있는 몸도 아주 좋아진 상태였다. 놀라게 해주고, 네가 나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나도 너 없으면 안 된다고 끌어안아줘야지. 시원한 바람을 품고 간 오이카와의 꿈은 쿠로오를 만나자 마자 조각났다. 당황한 얼굴의 쿠로오는 고민을 하는 것 같다가 밖으로 나왔고, 오이카와는 쿠로오를 따라가서 떨어지게 되었다. 미래를 알 수 있었다면 피곤하다며 방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가서 하루는 더 버텼을 텐데. 버티면서 쿠로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돌릴 수 있었을 텐데. 모두가 다 제 불찰이었다-라고, 오이카와는 수행원들에게 끌려가면서 생각했다. 몸을 조금만 추스른 다음에 다시 쿠로오를 만나러 갈 생각에 별로 반항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싸움 없이 지나간 날들이 조금 특이했다. 연인이면 서로 맞춰줘야 하는 거지, 한쪽한테만 다 맞춰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쿠로오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을 때 쿠로오 앞에서 예쁜 짓을 하면 쿠로오는 언제나 그렇듯 한숨을 내쉬고, 다음엔 그러지 말자고 말하고 오이카와에게 웃어줄 것이었다.
새로운 집 앞에서 이와이즈미를 볼 때까지만 해도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쿠로오의 배려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샐쭉 웃음까지 흘렸다. 쿠로오가 오이카와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오이카와도 처음 오는 곳에 오이카와의 소꿉친구가 먼저 와서 기다릴 리는 없었을 테니까.
“이곳에 오시지 말라고 부탁드렸습니다만.”
“응. 오늘은 쿠로쨩의 가이드로 온 게 아니야! 센터에 새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은지 궁금해서 왔어. 오이카와 씨 꽤나 고급인력이라고? 일반인 레벨에서 전투도 상위권이야!”
밖에 있는 것보다는 센터 안에 있어야 쿠로오를 볼 확률이 높았기에 고른 결정이었다. 다른 센티넬을 껴안고, 손잡고, 붙어 있을 생각을 하면 헛구역질이 밀려나올 것 같았지만 그래도 운이 좋다면 쿠로오와 같은 임무에 배치될 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 말을 섞을 기회도 올 것이었다. 쿠로오는 잘못한 선택도 그대로 밀고 가는 성향이 있기에 오이카와가 필요했다. 적당히 달래고 말을 섞다보면, 쿠로오가 오이카와는 제 가이드가 아니었다는 강한 말도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있을 것이다. 있어야 했다.
경비원이 위에 연락을 취하자, 오이카와는 절반 이상은 성공했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금만 더 구워삶으면 들어갈 수 있다! 쿠로오도 귀한 센티넬이지만, 오이카와 씨도 아주 중요한 가이드인 걸. 쿠로쨩과 적합률 95%인 가이드니까. 경비원이 무전 상대와 하는 말을 들으며 오이카와는 기대에 부풀었다. 손 한번만 잡을 기회만 있으면 된다. 오이카와는 쿠로오에 한해서, 누구보다 뛰어난 가이드니까.
“유용한 가이드가 많아서 센터는 오이카와 씨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일반인답게 센터에 오려는 생각은 하지 말고 사십시오.”
지니고 있던 웃음에 금이 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경비원을 향해 무전기를 달라고 했다. 아, 자기 PR은 스스로 해야 했는데. 그래야 남이 의무적으로 하는 것보다 자신이 하는 것이 장점을 더 피력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만 해보자는 오이카와의 말은 집으로 모셔다 드리겠다는 경비원의 기계적 대답에 묻혔다. 쿠로쨩이라고 부르려던 입도 막힌 채, 오이카와는 센터와 멀어졌다. 비라도 왔으면 물이 튄다며 천천히 걸어서 조금 더 센터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야속하게도 해가 쨍쨍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오이카와가 혼자 걷는 것보다 빠르게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경비원이 돌아가면 다시 센터로 향할 마음에 얌전히 문을 열고 들어가는 척만 하려고 했는데, 집 안에는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센터에서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를 잡고 있으라고. 쿠로오의 옆에 가지 못하게, 잡고 있으라고. 오이카와는 경비원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재빠르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제압하는 게 훨씬 더 빨랐다.
“일반인 이와쨩 주제에, 쿠로쨩보다 못생긴 이와쨩인데 왜 가이드보다 더 빠른 거야?”
오이카와 씨는 엄청 유능한 가이드란 말이야. 정말 유능해서 놓칠 수 없는 인재란 말이야. 그런데 왜 일반인 이와쨩이 더 빠르고 센데? 터져 나온 울음에 오이카와의 마음이 더해져 바닥으로 하강했다. 오이카와 씨는 정말 굉장한 가이드라고.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피해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도주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주저앉아서 울었다.
“현직 배구선수를 얕보지 마라, 망할카와.”
“나도 열심히 했어. 훈련에서 늘 1위 이케멘은 오이카와 씨였다고. 어떤 센티넬도 다 오이카와 씨의 가이딩을 받고 싶어 했는데. 그래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리고 쿠로쨩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쏟아내서 이제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감정이 오늘도 흘러 넘쳤다. 소꿉친구 앞에서 험한 꼴을 보인다는 생각은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들어오려다가 오이카와가 쏟아내는 감정에 밀려서 사라졌다. 이와이즈미가 울지 말란 소리도, 그만 울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기에 오이카와는 울다가 입을 열었다.
“쿠로쨩 고집쟁이. 같이 쌓아온 것을 멋대로 정리하는 성격파탄자. 항상 받아주다가 갑자기 돌아서는 배신자.”
“….”
“얼굴만 귀엽지 행동은 귀염성 하나도 없고. 웃는 얼굴도 사악해 보이는 게 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 닮았고.”
“그래.”
“그런데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이와쨩한테는 미안하지만, 지금 날 달래주는 게 쿠로쨩이었으면 좋겠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알아.”
한참을 울던 오이카와의 몸이 맥없이 쓰러졌다. 이와이즈미는 센티넬과 페어가 끊어진 것 때문에 충격을 받아 정신적, 신체적 충격이 커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센티넬이 이렇게 정신이 나간다던데.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질질 끌며 침대에 던지려다가, 불쌍한 얼굴을 한번 보고 곱게 눕혀주었다. 오이카와가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하고 한숨을 돌린 이와이즈미는 그제야 방 안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뜯지도 않고 쌓여있는 박스, 아주 기본적인 가구만 있는 황량한 공간. 이와이즈미가 센터에서 연락을 받고 처음 왔던 날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이곳에 정을 붙이지 않고 센터로 돌아갈 생각이었겠지. 오늘 우는 것을 보니 하나도 잘 된 것 같지 않지만. 일단 밥이라도 먹이고 집을 좀 치워주고 갈 생각에 이와이즈미는 몸을 일으켰다. 한참을 울었으니 다시 깨어나면 조금 진정되어 있겠지.
이와이즈미의 이 생각은, 외출 후 돌아와 홀로 중얼거리고 있는 오이카와를 보기 전까지만 유효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뭐?”
“쿠로쨩의 옆에서 누가 가이딩을 하던, 내가 그 사람보다 몇 배는 더 잘할 수 있는데.”
“오이카와? 야, 정신 차려.”
“응? 왜 그래, 이와쨩?”
“너 방금 혼잣말을…. 아니야.”
“이와쨩,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오이카와, 한 대 때리고 싶은데, 때릴게.”
“악, 이와쨩, 잠깐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조금만 줘!”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손이 스파이크를 치는 것처럼 자신의 등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등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숨길 필요도 없어졌지만. 쿠로오의 생각이 난 게 슬퍼져서, 오이카와는 소리를 질렀다. 아파, 이와쨩!
“닿지도 않았거든?”
“정말? 맞았는데! 이렇게나 아픈데! 이와쨩 때려놓고서 안 때렸다고 하는 거 아니야?”
그 날, 이와이즈미는 별 소득 없는 대화만 하다가 돌아갔다. 갑자기 괜찮은지 물어보고, 아니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오이카와는 큰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저럴 수도 있는 거지.
그저 쿠로오가 보고 싶었다.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어떤 사고에 휘말린 것은 아닌지, 능력을 너무 과하게 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마지막 것만 빼면 쿠로오가 밖에 나와 있는 자신에게 할 걱정들일 텐데. 그리고 걱정들 사이로, 죽순처럼 한 생각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쑥쑥 자라 바닥을 흥건히 적시던 걱정을 모두 흡수해버렸다. 쿠로오가 다시 자신을 만나지 않을 생각이라면, 자신이 만나러 가면 될 일이었다. 그래, 오이카와 씨 머리 아직 안 죽었어! 잘 돌아가! 오이카와는 스스로를 칭찬하며 웃었다.
어떻게든, 한 번 더 만날 수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못 봐서 말라 죽을 거라면, 보고 죽는 게 훨씬 나으니까.
“음, 음! 잘 들려?”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것처럼 마이크를 콩콩 두드렸다. 텔레파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최근에 약간의 투시 능력까지 개화한 제 짝을 위한 배려였다. 다른 사람의 머리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기 전에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기 위해서. 쿠로오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전해질 거라는 그 사실이 기뻐서, 울고 싶을 정도로 기뻐서 오이카와는 쿠로오가 앞에 있는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입을 열었다.
“안녕, 쿠로쨩? 어제보고 오늘은 처음이네! 어제는 잘 잤어? 빌런 오이카와 씨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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